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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

젊다는 것은 '88만원' 짜리..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유성호



이것은 '슬픈' 이야기다. 김예슬(25)의 솔직한 이야기는 분명 우리를 울린다. 가슴 깊숙한 곳, 작은 상자 속에 꼭꼭 묻혀두고 절대 꺼내보려고 하지 않았던 오늘날 '나의 이야기' 는 우리를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뜨린다.

                           

 우리는 김예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솔직한 '고백' 인 동시에, 오늘날 대학생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던지는 '메세지' 이기 때문이다. 나는 김예슬의 글처럼 내 심장에서 가장 두껍고 단단한 곳을 관통하는 글을 읽어 본적이 없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신념' 처럼 우리를 지배하던 것이었다. '스펙' 이라는 교리는 우리를 그것의 노예로 만들었고, 대기업은 그러한 교리를 잘 지킨자들이 갈 수 있는 '낙원' 이었다.  이처럼 오늘을 사는 대학생들에게 취업이라는 것, 특히 대기업을 향한 집념이라는 것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고, 외면할 수 없는 심장의 가장 단단한 곳이었다.

그런데, 이 '심장'이 무너져 버렸다. 이윽고 깊은 절망속으로 들어감을 경험해야 했다. 한동안의 허탈감은 아무래도 글이 가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통한 인식과 그 속에 담겨진 허무함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88만원 세대'를 읽을 때도 들지 않았던 감정이었다. 또한 로스트 제네레이션에게 바치는 영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절망감이다. 이러한 '낯선 경험' 아무래도 그 글이 포함하고 있는 '낯익은 경험' 을 우리 모두에게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 '낯익은 경험' 은 무엇인가? 이것은 김예슬의 글에서 낱낱히 '목격'되고 있다. 우리 내 대학은 졸렬한 장사치가 돼 버린채, 젊은날의 꿈을 갉아 먹고 있다. 국가는 '고 스펙, 저 임금'의 산업예비군을 양성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대학을 늘려왔고, 2009년 기준으로 전체 고졸의 80%가 대학에 가는 작금의 현실에서 대학은 '선택'이 아닌 '필수'로 인식된다. 이러한 인식은 학력과잉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양성된  우수한 인재들을 기업은 콩나물 고르듯 뽑아갔다. 남은 것은 잉여인간으로 낙인 찍힌 채로 살거나 그저 그곳에서 기약없는 '간택'을 갈망하며 뿌리 끝에서 부터 썩어들어간다. 간택을 받기 위해 추구하였던 패자에 대한 '오만'과 '희열'은 결국 우리의 인간성을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시켰고, 부조리한 사회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는 부조리한 '나'를 만들었다.

 오늘날의 88만원 세대들은 그 끝이 알 수 없는 성장통을 겪고 있다. 기성세대들은 88만원 세대를 '철없고, 버릇없고, 무책임한' 한 세대로만 간주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과거의 자신을 들먹이며, 지금의 우리를 비하한다. 한국을 통치하는 가장 높은 분께오서는 최근 까지도 '눈높이를 낮춰라' 라고 88만원 세대에게 주문한다. 청년실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자리가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대기업만 밝히는 청년들의 눈높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 라는 말로 풀이해서 말한 것이다. 모든 문제는 청년들에게 있다라는 것이다. 이같은 기성세대들의 담론은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먹혀들어왔다. 모든 국가기관과 경제단체와 언론, 정치, 문화, 사회기관 등 소유가능한 모든 수단을 독점한 기성세대들은 그들의 막강한 영향력을 기반으로 눈높이를 낮춰 야들야들하고 유연한 비정규직과 88만원의 삶을 살도록 강요한다. 그것이 싫다면, 싫은대로 사랑도 우정도 너희에게는 사치일 뿐이라고 이야기 한다. 

 김예슬의 글은 사랑도 우정도 낭만도 결여된 채, 경주마로서의 비참한 삶을 달려온 우리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시'이다. 아마도 우리의 삶은 이 '시'가 우리의 마음을 적시는 이 순간에도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기성세대들은 두 주먹에 꼭 쥔 채, 놓지않고 있는 기득권을 앞으로도 풀어놓지 않을 것이고, 척박한 이 땅에 민주화를 이야기하고  자유를 논하던 386 세대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서만 우리를 응시한다.

"김예슬 선언 앞에 교수들의 양심을 묻습니다" 이대학생의 글,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서유진



 모든 기성세대와 386세대가 그런 것 만은 아니다. 분명 지각있는 사람들도 존재하겠지만, 문제는 그들은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이 행동했더라면 이 사회가 이처럼 세대착취적 구조를 띠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처럼 정당화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88만원 세대가 투쟁을 하지 않는 것은 이 땅에 그들의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있기 때문이다. 88만원 세대들이 해야하는 일은 이 헤게모니를 파괴하는 일이다. 그람시가 말하는 투쟁의 장으로 끌어오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힘든일이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예슬의 글이 그것을 증명한다. 우리가 그것에 '공감'하고 '공분'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의 삶을 바꿀 수도 있다. 그것이 한낱 공분하는 것에 불과할 지라도, 인식은 했지만 공유는 하지 못했던 그동안의 '울분'을 김예슬의 글을 통해서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큰 수확이고, 이것이 확장될 때야 비로소 우리는 그들에게 길들여지는 경주마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서로를 분리하던 트랙에서 벗어나 우리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