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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권력을 쫓는 허망한 구름..by racrosina



이 글의 racrosina의 글입니다. 


 이준익 감독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보고왔다.
영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할 게 가득한 영화였다. 시험끝나고 가볍게 영화한편 보려다가 잠 못들고 리뷰 쓰는 밤이다.



이 글은 주관적 생각+스포일러 듬뿍 이므로 영화를 보고 해석해보고 싶은 사람은 보지 않는 것이 좋다.

감독이 직접 밝히는 코멘터리를 듣고 싶다면 이준익 감독의 "약정세대’에게 고함"(click) 이라는 인터뷰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혼란스럽다. 그 와중에 정치는 밥그릇싸움이 되었다. 패를 나눠 서로를 할퀴고 비난하는 것이 전부가 되어버린 정치판. 조선시대의 붕당정치나 지금의 여당 야당이나 다를 게 없다. 서로를 비난하는데 혈안이 되어 시민과 국가를 위한 정치의 본래 목적은 사라졌다. 

이런 썩어빠진 세상을 뒤엎고 왕이 되고자 하는 검객 이몽학. 나는 그의 이름을 이렇게 해석했다. 꿈을 꾸는 ‘학’이라고. 예부터 학은 선비의 상징이었다. 선비라 함은 문무를 겸비한 이상적인 사람으로 그의 흰 도포는 고결하고 이상을 쫒는 선비 그 자체였다.



      “양반은 권력 뒤에 숨고 광대는 탈속에 숨고 칼잽이는 칼 뒤에 숨는다고 그러데. 근데 난 그런 세상이 싫더라고.”

                                                                                                                                                                 -이몽학


 그러나 그의 올곧음은 그의 이상을 가리는 구름이었다. 이상을 위해 그가 휘두른 칼에는 자신만이 옳다는 독선이 묻어있다. 그는 텅 빈 궁궐을 보며 서서히 꿈에서 깨어난다. 더 이상 베어버릴 것이 없는 끝에는 자신을 향한 분노로 가득 찬 복수와 자신이 버린 사랑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 최고의 검객인 그는 애송이 견자의 칼에 목을 스칠 만큼 흔들리고 붕괴한다.
 

자신에게 애정을 주던 아버지를 죽인 이몽학에게 복수하기 위해 길을 나선 견자. 그는 스스로 개 견(犬), 아들 자(子) 개새끼라고 소개한다. 그는 황정학을 따라다니며 이몽학을 쫒는다. 들이대고, 부딪히고, 소리치는 행동형 인간. 그는 꿈도 없고, 사랑하는 여자를 내칠 만큼 차갑지도 못하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나아간다. 그 끝에서, 이몽학이 꿈꾸던 왕좌에 앉아 허탈한 표정을 짓는다.

                

                       
                          “너 저기 앉으려고 그렇게 많은 사람 죽였니. 니가 왕이 된다고 세상이 달라질 거 같아?”
                                                                                                                                                                -견자



견자의 절망은 결국 이몽학의 가슴에 칼을 꽂게 만들었다.

뒤이어 몰려오는 일본군을 향해 황정학의 칼과 이몽학의 칼을 손에 쥐고 달려드는 견자. 무모하다는 걸 알면서도 맞서는 견자다운 최후였다.

영화의 마지막 견자가 황정학의 칼을 뽑아 커다란 달을 베는 장면은 거짓된 이상을 성장한 견자가 벨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에서 의미하는 ‘달’을 해석하는 것에 따라 많이 달라질 것이다.

견자를 따라 자신을 버린 연인 이몽학을 찾아 나선 이몽학의 연인이자 기생이었던 백지. “겨우 여기오려고 떠난거야?” 연인의 헛된 꿈을 꾸짖으며 이몽학을 끌어안고 “꿈속에서 만나요.”를 하염없이 말하던, 이몽학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을 보여준 백지.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내기엔 뭔가 아쉬운 캐릭터였다.

 이몽학의 반란을 막고 세상을 지키려는 전설적인 맹인검객 황정학. 이몽학과 묘하게 대비되는 이름이다. 대동계를 이끌어 반란을 주도하는 이몽학을 막기 위해 그를 쫒는다.

황정학은 돌려 말한다. 세상에 대한 관조적 시선을 담아 해학과 은유로 이야기 한다. 그렇기에 더 와 닿고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칼잽이는 칼 뒤에 숨어야 하는 거여.”
                                                                                                                                    -황정학

                                                                     “구름에 가렸다고 달이 아니더냐?”

                                                                                                                                    -이몽학



그는 맹인이기에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이몽학의 야심과 그 끝을 예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용인 관청에서 이몽학과의 승부 끝에 칼에 찔리고 나누던 대화가 생각난다.



“몽학아, 한양가지 말어라.”

“우리가 같이 살자고 꾼 꿈이 이 길 아니오?”

“아니여. 이것은 모두 죽는 꿈이여.”

“난 이 꿈을 깨고 싶지 않소.” 



영화는 끝났지만 영화가 던져준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정답이 없고 뒷맛이 쓴 영화.

원래 몸에 좋은 약이 쓰다고 하지 않던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관객의 수만큼 해석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된다.




by  racrosina (sarangcej@naver.com)
이 글의 저작권은 racrosina에게 있습니다